술꾼에게는 술꾼만의 처방이 있다 고독한 애주가, 하쿠쯔루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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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감기계의 얼리어답터. 의사 선생님은 콜록이며 진료실에 들어오는 나를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리신 게 분명하다. 아직 생강차나 유자차가 맛있는 계절은 아닌데요… 나는 이상한 변명을 하면서도, 내 몸에 들어온 이 불청객과 나눌 음료가 없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진료를 끝내며 의사 선생님은 덧붙였다. “약 먹는 동안은 술 절대 하지 마시고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겨우 감기 따위에 술을 마시지 말라고요? 이것은 기침이 나오니까요 숨을 쉬지 마세요… 정도의 무책임한 판결이 아닌다. 슬픔에 젖은 코가 크게 훌쩍인다. 때마침 밖에는 서럽게 비가 울어댔다.

“안타깝게도 병원 밖은 음주쟁이들의 잔치였다”

집으로 가는 길이 하필이면 음식점과 술집거리라니. 특히나 이렇게 비가 내리는 밤이면 골목골목마다 술향기가 짙고, 사람들이 나누는 수다가 드라마 끝장면처럼 궁금하게 느껴진다. 나는 체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자카야의 따뜻한 온기에 빨려 들어갔다. 분명 이곳에는 감기를 낫게 해 줄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렸다고? 그럴 줄 알고 음식과 술을 준비했지”

이자카야에 단골이 되면 좋은 점이 있다. 특히 주인이 드라마 심야식당에 심취해있다면 더욱. 나는 테이블 바에 앉아서 오늘 나에게 어울리는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주인장 역시 해볼까 하는 메뉴를 실험하는 좋은 실험체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감기에 걸려 미각과 음주의 기쁨을 모르는 몸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잠시 주방에 들어가더니 사케를 내놓았다. 그가 내놓은 것은 ‘마루(まる)사케’로 마트나 편의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이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사케다. “아! 술은 안된다니까?”라고 말하는 내 앞에 예쁘게 생긴 도쿠리와 주전자가 놓였다. 휴 다행이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듣지 않은 거겠지?

“따뜻한 사케가 담긴 도쿠리는 진리야”

사케 전문가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보통사람에게는 도쿠리의 아름다움이 곧 사케의 맛이다. 게다가 데워서 마시는 사케는 특별함을 더한다. 요즘처럼 저녁 바람이 쌀쌀할 때는 그 진가가 더욱 발휘된다. 심지어 나는 감기에 걸렸다. 이보다 더 사케 마시기 좋은 상태가 어디 있을까?

주전자에 데워진 사케를 잔에 따라 마신다. 나는 이따금 소주가 달다고 느끼는데, 사케는 항상 달달하다. 마루 사케는 너무 달지도, 쌉싸름하지도 않은 친절함으로 입을 감싸준다. 13~14도의 제법 강한 도수지만 목에 부드럽게 넘어간다. 곧 사케의 온기가 목을 타고 온 몸에 번진다. 이걸 느끼려 우리는 푹푹 찌는 여름을 견뎠나 보다.

“통마늘찜 먹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렴”

맛있는 술에는 안주가 빠질 수 없다. 럭키박스처럼 호일 안에 감춰진 음식은 마늘이었다. 이름하야 ‘통마늘 호일찜’이라고 하는데, 마늘을 잘못 쏟아부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늘만 있었다. 마늘 먹고 사람이 되라는 건가. 일단 줬으니까 먹는다. 이것이 이 세계의 재미다.

사케가 몸을 덥혀주는 온돌방이라면, 통마늘찜은 불가마랄까? 생마늘처럼 아리지 않고 식감도 좋다. 그런데 몸에 들어가는 순간 뜨거운 기운이 화르륵 번진다. 뜨거워진 내 몸을 사케로 달랜다. 그리고 다시 마늘찜. 이렇게 사케와 마늘찜의 어르고 달래기로 내 몸은 불타게(?) 만들었다.

“술꾼에게는 술꾼만의 처방이 있다”

이자카야를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케와 마늘찜의 후끈한 손길에 말끔한 도쿠리로 태어난 기분. 아까는 모질게 쌀쌀하기만 했던 저녁 바람이 이제는 제법 기분 좋다. 의사 선생님은 이걸 주정이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회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옷깃을 재정비하고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따뜻한 사케는 더 맛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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