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게 되었을까? #콜쉬츠키, 유럽과 커피를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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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언제나 취해있기를 원했다.
반대로 이슬람은 항상 깨어있길 바랐다.

취한다는 것, 깨어있다는 것. 그것은 신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때문에 유럽은 와인을, 이슬람은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이슬람 문화권만이 추구하는 음료였다… 고 말하면 누가 믿기나 하겠는가??

그렇다. 요즘 사람들은 커피를 이야기할 때 이슬람 국가보다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떠올리지.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커피라는 음료는 어떻게 유럽에 넘어가게 되었을까?


똑똑, 문 열어주세요
오스만 투르크 입니다

1683년, 오늘날 오스트리아 수도 빈(Vienne)은 성문을 걸어 잠갔다. 성문 밖에 15만 명의 오스만 투르크(터키)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빈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자, 유럽으로 진출하는 관문이었다.

이번 포위전은 2번째였다. 이를 지휘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재상 카파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şa)는 이번만은 이곳을 차지해야 했다. 황제에게 빈을 선물로 주겠다고 했거든.

이미 황제는 오스만 투르크 군대의 소식에 일찍 대피했다. 남아있는 시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뭐 어때? 커피나 한 잔 하면서 기다리면 알아서 나올 것이 분명했다.


내 이름은 콜쉬츠키
폴란드의 신현준이죠

성문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은 느긋했다. 커피나 홀짝이다가 시간에 맞춰 폭탄을 성문 안으로 던지거나, 지하 땅굴에 심어놓으면 되니까. 하지만 빈 시민들은 감감무소식인 지원군을 기다리는데 지친 상태였다. 연락을 받으려면 성문 밖의 15만 명의 적군을 뚫고 가야 했다. 그걸 누가 해.

그런데 나타났다. 게오르크 콜쉬츠키(Georg Kolschitzky)라는 남자. 그는 자신은 빈 시민이 아닌 폴란드 출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봐도 그를 중동 사람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적임자가 어디 있겠나. 빈 시민은 그에게 도시의 운명이 걸린 편지를 맡겼다.


콜쉬츠키는 말했지
모든 건 얼굴 빨(?)이라고

8월 13일, 오스만 투르크 복장을 입은 신현준… 아니 콜쉬츠키는 오스만 투르크인 그 자체였다. 문제는 그 사실은 콜쉬츠키만 몰랐나보다. 콜쉬츠키와 시종은 폭우가 쏟아지는 적진을 지나가며 오스만 투르크어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얼마나 구슬픈지 오스만 투르크 사령관이 그들을 발견했다. 젠장.

인자한 사령관은 비에 젖은 동포를 불쌍히 생각해 따뜻한 커피를 대접했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크리스천들이 발견된다고 하니 조심하라고까지 알려줬다. 뜻밖의 이득. 헤맬 일 없이 지원군의 위치를 발견한 콜쉬츠키는 뿌듯함을 느꼈다. 지원군이 콜쉬츠키를 오스만 투르크 병사라고 생각해 총알을 날리기 전까진.


이 낙타 사료를
가져가도 좋을까요?

지원군으로 온 폴란드 군을 만난 콜쉬츠키는 다행히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콜쉬츠키가 다시 빈으로 돌아오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빈 시민들은 지원군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에 사기가 올랐고 콜쉬츠키는 도시의 영웅이 되었다.

9월 12일, 드디어 마지막 격전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드디어 성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그들의 깃발이 꽂히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때 빈 시민들은 멀리 산 아래에 폴란드 국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지원군이 당도한 것이다. 12시간이 넘는 싸움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너무 황급히 도망간 바람에 그들의 무기, 15만 명이 먹고 자는데 사용된 천막들과 들소, 낙타, 노새들 수많은 곡식을 두고 가버렸다. 그 중에는 앵무새, 바다표범 처럼 왜 데려왔는지 모를 희안한 생물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빈시민들과 폴란드인들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500자루나 되는 커피는 아무도 챙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낙타 먹이 정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콜쉬츠키가 말한다. “저거 제가 가져도 되나요?” 아 버릴건데 가지시죠.


오스트리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탄생하다

전쟁이 끝난 후 콜쉬츠키는 빈 명예시민권과 집 한 채를 보상받는다. 그리고 콜쉬츠키는 주워온 커피 500자루를 이용해 오스트리아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차린다. 그래서 성공했냐고? 안타깝게도 빈에 사는 사람들은 커피를 잘 모를 뿐더러 와인을 더 좋아했다.

콜쉬츠키는 사람들의 입맛을 저격하기 위해 커피 제조방식을 바꿨다. 전통적인 터키쉬 커피는 커피를 잘게 가루 내어 물에 타먹는 방식이다. 때문에 유럽사람 입맛에는 텁텁함이 느껴졌다. 콜쉬츠키는 종이에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흘려보냈다. 오스만 투르크 입장에서 보면 커피를 씻은 물로 장사를 한 것이다.

최초의 드립 형식 커피를 만든 콜쉬츠키는 그 위에 우유와 꿀을 넣었다. 커피에 우유를 타는 카푸치노, 카페라떼의 원형 멜랑쉬(Melange)가 만들어진 것이다. 거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문양을 닮은 빵 크루아상을 곁들였다. 그리고 본인 자신이 오스만 투르크 옷을 입고 서빙을 했다.

그의 커피하우스는 음료와 빵, 콜쉬츠키를 보며 오스만 투르크를 물리치고 얻은 기쁨의 공간이 되었다. 아 참! 콜시츠키의 커피하우스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파란 자루의 커피하우스. 즉 블루보틀(Blue bottle)이다. 우리가 아는 그 블루보틀도 콜쉬츠키의 이야기에서 가져왔다.


커피가 유럽 사회에
가져다준 것들

물론 콜쉬츠키가 유럽 최초로 커피를 전달했다는 이야기는 이견이 많다. 이전에도 분명 유럽 내에 커피에 대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커피를 유럽에 전파한 사람으로 콜쉬츠키를 떠올린다. 그의 용기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이야기에 매료되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커피하우스의 등장으로 유럽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유럽 사람들은 깨어있는 것을 넘어 사유하기 시작했고 커피하우스 안에서 서로의 생각을 토론했다. 시와 예술, 낭만이 가득한 와인의 유럽은 철학과 과학, 이성이 가득 찬 커피의 시대로 변화한다. 그렇게 도시를 구한 남자의 음료는 세계를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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