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코카콜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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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콜라만 마시면 커서 어른이 될 수 없어!”

엄마의 한마디 덕분에 나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어른을 포기하고 콜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삶의 목표. 그것은 ‘엄마 앞에서 당당히 콜라를 마시는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거의 이뤄가고 있다.

콜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코카콜라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코카콜라는 단순히 음료를 넘어선 문화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심지어 인류가 멸망해도 누군가는(외계인이나 바퀴벌레라도) 코카콜라를 마실 것 같다. 이토록 완전무결한 음료. 하지만 코카콜라에도 어설프고 찌질한 시기가 있었다. 오늘 마시즘은 코카콜라의 탄생기를 들춰본다.


최초의 콜라는
술이었다?

프로탄산러라면 코카콜라를 만든 사람이 존 펨버튼(John Pemberton)이란 사실을 안다. 정원에서 두통약을 만들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인생은 쉽지 않다. 존 펨버튼은 코카콜라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존 펨버튼이 활동하던 시대는 19세기 말 ‘매약의 시대’다. 이 말은 즉슨 약을 파느라 정신이 없던 때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는 신문지면의 반절이 약 광고였다. 물론 이렇게 홍보한 대부분의 약은 민간요법과 느낌적인 느낌으로 만든 엉터리였다. 한 마디로 ‘어디서 약을 팔아?’ 싶은 것들이랄까?

우리의 존 펨버튼 역시 그런 약사 중에 일부였다. 이미 한 번의 파산으로 벼랑 끝에 몰린 그는 ‘코카나무 잎’에 주목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를 약재로 사용했는데 아픔을 잊게 하고 기분을 좋게 했다. 이름에서부터 눈치채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코카인이다(놀라지말자 없어진지 오래다).

(코카콜라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프렌치 와인 코카’. 이거 벼룩시장에서 5달러에 구했다던데)

어디 경찰, 검찰, 쇠창살이 전부 출동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 코카나무 잎은 합법적인 약품이었다. 이미 ‘뱅 마리아니’라는 와인에 코카나무 잎을 담근 음료가 유행을 했다. 존 펨버튼은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아프리카의 콜라나무 열매를 섞는 것이다. 그렇게 1885년 ‘프렌치 와인 코카(French Wine Coca)’가 세상에 나온다.

이제 돈 버는 일만 남았다. 실제로 프렌치 와인 코카의 판매량은 늘어났다. 하지만 1886년 애틀랜타에서 미국 음료 역사를 뒤흔들 투표가 시작된다. 바로 알콜 금지. 즉 금주법을 애틀랜타에 베타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렇게 프렌치 와인 코카는 불법이 된다. 코카나무는 괜찮지만, 술은 철창이니까.


이것은 합법적인 음료야
근데 이름을 뭐라고 하지?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원에서 이것저것 섞다 보니까 코카콜라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순진한 이야기다. 존 펨버튼은 프렌치 와인 코카에서 알콜을 빼야만 했다. 결국 그는 코카나무 잎과 콜라 열매의 추출액을 섞어 짙은 갈색의 시럽을 만든다. 이제 이걸 와인 대신에 다른 음료에 섞어야 했다. 그리고 당시 약국에서 판매하는 ‘소다수(탄산음료)’에 이 시럽을 넣었다. 콜라의 탄생이다.

존 펨버튼의 콜라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라면 거짓말이다. 그는 콜라를 파는 약국에 조카를 보내봤지만 하루에 5~7잔이나 팔리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사업 파트너이자 회계담당인 프랭크 로빈슨(Frank Robinson)과 아이디어를 모은다. 먼저 프랭크 로빈슨은 이 음료에 멋진 이름을 붙여준다. 코카나무와 콜라나무의 만남이니까 ‘코카콜라(Coca-Cola)’가 어떨까?

(최초의 코카콜라 광고, 코카콜라! 맛있고 상쾌하며 기분을 복돋아 줍니다!)

그리하여 1886년 5월 8일 최초의 코카콜라가 판매된다. 사실 당시의 코카콜라는 직장인 남성을 위한 박카스 같은 것이었다. ‘이것을 마시면 두뇌를 깨우고, 신경성 질환을 낫게 하며, 우울증도 치료하고 아무튼 다 나을 테니 읽었으면 사거라’ 식의 광고를 뿌렸다.

다음 해에는 로고도 디자인했다. 이것 역시 프랭크 로빈슨의 작품이었다. 그의 독특한 필체로 적은 코카콜라 글씨는 여전히 코카콜라의 필기체 로고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회사에서 재능을 자랑하면 회계담당도 디자이너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병만 쥐어도
코카콜라인걸 알 수 있도록

멋진 음료와 이름, 로고까지 만들었다. 그렇다면 드디어 존 펨버튼이 돈을 쓸어 담을 일이 남았을까? 아쉽게도 그는 살아생전 코카콜라로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188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코카콜라에 대한 지분을 이곳저곳 싸게 판매를 했다. 흔한 음료가 될 뻔하던 코카콜라를 다시 모은 사람은 아서 캔들러(Asa Candler)였다.

존 펨버튼은 코카콜라의 창시자라면, 아서 캔들러는 코카콜라 최초의 CEO다. 그는 코카콜라를 전국적으로 대중화시켰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 음료가 유명해질수록 유사제품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아서 캔들러는 전국의 디자이너에게 선포한다. ‘만지기만 해도 코카콜라임을 알 수 있는 병을 만든 자에게 100만 달러를 주겠다.’

1916년, 코카콜라만의 특별한 유리병. ‘컨투어 보틀(Contour Bottle)’이 만들어진다. 많은 이들은 여성의 몸매를 보고 컨투어 보틀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사실은 디자이너가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에 있는 카카오 열매 사진을 따서 만든 것이다. 함정은 디자이너가 그 사진이 콜라 열매라고 착각한 것. 이래서 사람은 검색을 잘 해야 한다.


코카콜라에
산타클로스가 나타난 이유

코카콜라는 이제 병만 잡아도 알정도로 유명해졌다. 코카콜라는 이참에 성인 남성을 벗어나 여성과 아이에게도 매력을 뽐내기로 했다. 때문에 광고에서 어린 아이나 가족을 출연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1911년 하비 와일리(Harvey Wiley) 박사가 코카콜라와 고소전을 펼친 것이다. 그는 당시에 미국 먹거리의 첨가물에 의문을 던지던 이였다. 오늘날로 친다면 먹거리 X파일이라고 할까? 사실 그의 활약으로 오늘날 미국 식품의약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그가 코카콜라를 공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코카콜라의 성분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코카콜라는 광고에 어린이를 출연시켜서 아이들을 병들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코카콜라의 해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토끼와 쥐에게 코카콜라를 계속 먹였다. 콜라만 마시다니 부러운 것들.

둘 사이의 법정공방은 코카콜라의 승리로 끝났다. 아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카페인’이었다. 하비 와일리는 코카콜라가 이를 숨겼다고 했지만, 코카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페인이 든 재료이름인 콜라를 이름으로 썼다. 법정은 코카콜라가 굳이 카페인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산타 형이…거기서 왜 나와?)

법정에서는 이겼지만 코카콜라의 매출은 주춤했다. 코카콜라는 하비 와일리와 몇 가지 약속을 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킨다. 먼저 코카콜라에 있는 카페인의 양을 줄이는 것. 그리고 코카콜라 광고에 어린아이를 출연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1931년, 코카콜라의 광고에 산타클로스가 나온다. 하비 와일리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켜 어린아이를 광고에 등장시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코카콜라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의 종신모델(?)이 되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래서 계약서는 잘 살펴봐야 한다.


코카콜라 네가
방해물 3대장을 넘을 수 있을까?

코카콜라는 산타클로스를 타고 멀리 날아갔을까? 안타깝게도 코카콜라를 향한 악재는 끝나지 않았다. 먼저 찾아온 것은 192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대공황’이었다. 미국 경제가 폭삭 주저앉아 모두가 직장을 잃은 그때. 많은 이들은 코카콜라를 누가 사서 마시겠냐고 예측했다. 하지만 모든 기업들이 파산을 한 경제 대공황 시기가 바로 코카콜라의 황금기였다.

비결은 바로 코카콜라의 가격이었다. 코카콜라는 만들어지고 70년 동안 1병에 5센트의 가격을 유지했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집이나 차를 구매하는 것은 포기했지만, 값싼 코카콜라를 포기하지 않았다. 거기에 코카콜라의 광고가 주는 희망찬 메시지에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불황을 견뎠다. 하지만 뒤이어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었다. 미국 금주법은 코카콜라가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사회에서 미국인이 기댈 수 있는 음료는 커피 아니면 콜라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시 코카콜라를 누가 마시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코카콜라는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대낮에 사교용 음료로 코카콜라를 마셨다.

(안녕 나는 펩이야. 더 싸고, 많지. 제발 마셔줄래?)

알콜의 역습에도 멋지게 방어를 성공했다. 마지막은 바로 ‘펩시콜라(Pepsi Cola)’다. 1898년 만들어진 콜라. 하지만 당시 코카콜라에게 펩시콜라는 거인 앞의 모기 같은 존재였다. 작고 귀찮은 정도? 펩시콜라는 1922년과 1931년 경영악화로 코카콜라에게 자신을 인수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코카콜라는 무시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클 줄은 몰랐지.


가장 미국적인 음료
세계를 지배하다

(1950년 타임지 표지. 자 웃으면서 마시는거야, 그렇지)

혁명의 시작은 늘 초라하다. 코카콜라도 마찬가지다. 엉터리 약사의 두통약으로 시작한 코카콜라는 몇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미국 최고의 음료가 된다. 아니 미국의 대중문화, 이데올로기 자체를 대표하는 매개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모두 똑같은 가격을 내고, 똑같은 맛의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것. 이것은 가장 미국적인 가치이자 자존심이었다.

지난 포스트 <코카콜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에서 말했듯 가장 미국적인 음료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다. 그리고 1950년 타임지에는 최초로 인물이 아닌 제품이 표지모델을 장식하게 된다. 바로 코카콜라다. 우리는 여전히 이 음료를 마시고 있다. 아니 코카콜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토록 큰 성장을 한 음료를 마시는데, 어른이 되지 못한들 어떠하리.

참고문헌
1. 역사 한 잔 하실까요, 톰 스탠디지
2. 주제가 있는 미국사, 강준만
3. 욕망의 코카콜라, 김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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