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즈는 어떻게 음료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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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가 가득한 야구 경기장을 홀로 걷는다. 응원봉을 들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승리 후에 마실 음료뿐이다. 그는 경기장 뒤편 편의점을 들락 거린다. 치맥을 사 오던 응원단장은 소리 내어 외친다. 그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음료신상털이…가 아닌 직관 필패 요정 마시즘이다! 쫓아내!


진정한 맥주는
야구장이 아니겠습니까?

맥주를 사준다고 해서 쫓아간 야구장에서 나는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기아 타이거즈. 숨 쉴 틈도 허용하지 않는 투수들과 불자동차 같은 타자들로 구성된 최강팀. 정규시즌은 물론 한국시리즈까지 압도적으로 이겨버린 그 팀에 반한 것이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진다는 것은 무슨 기분일까? 궁금해”

건방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신께서 내 소원을 이뤄주셨다. 올해는 진다는 기분이 스팸메일처럼 날아오더라고. 아주 많이.


편의점에서
타이거즈를 만나다

(잘 나갈 때는 안 내고, 왜 하필!)

내가 비록 야구장에 왔지만, 우리가 보고있는 것이 야구인가 한 편의 인질극인가를 모르겠다. 될 듯 안될 듯 풀리지 않는 경기에 갈증이 나서 편의점에 들어갔다. 승리는 보이지 않지만, 헛것은 잘 보이는 기아 팬의 눈에 기아 타이거즈 옷을 입은 음료가 보인다. 아아 이게 뭐야.

아니다. 진짜 ‘기아 타이거즈 음료’다. CU편의점에서 KBO와 협약을 맺고 나온 스페셜 음료라고. 하지만 나는 이런 소식에 손바닥 치며 기뻐할 순진한 팬이 아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 음료를 뜯어보았다. 물론 찬찬히 의심하기 위해 5병이나 샀지만.


이 음료에는
큰 문제가 있다!

(등짝… 등짝이 허전해서 번호를 달아주었다)

나는 기아 타이거즈 음료의 큰 단점을 발견했다. 이 음료는 사람 몸통 모양이다. 그 위에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혀서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을 연상하게 한다. 문제는 기아 타이거즈에는 이런 몸매를 가진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CU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게 분명하다. 이 음료에는 유니폼에서 가장 중요한 ‘등번호’가 없다. 물론 스스로 좋아하는 선수의 등번호를 적을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이 있다면 기아타이거즈 음료병의 몸매에 선수 번호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위증을 할 수 없다.

그렇다. CU는 기아 타이거즈에 일종의 경고를 보낸 것이다. 지난해 우승에 취해 바닥으로 내려간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에게 운동의 중요성을 음료로 보여준 것이다. 타이거즈 선수들 중에 자신의 등번호가 박힌 음료를 출시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당장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몸을 만들어라.


왜 맥주가 아니라
주스여야 했을까?

(얘네는 맥주인데 왜! 우리는 주스인가!)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메이저리그와 야구>에서도 밝혔듯이 야구하면 떠오르는 음료는 당연히 ‘맥주’다. 그런데 기아 타이거즈 음료는 ‘주스’다. 주스 역시 나쁘지 않지만 야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성가대 옷을 입고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CU의 사려 깊음이 느껴진다. 기아 타이거즈 팬들은 기분이 좋지 않다. 지기 때문이다. 지면은 술을 마신다. 안타깝게도 야구는 월요일 빼고 매일 한다. 매일 술을 퍼마셔야 한다. CU는 타이거즈 팬이 알콜중독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음료를 건강한 주스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이 츤데레 녀석들. 내가 모를까 봐?


그런데 왜 하필
수박 맛인가?

그렇다고 CU의 친절에 모든 마음을 주지 말자. 우리는 만만치 않은 타이거즈 팬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아 타이거즈 음료를 컵에 따라 마셔보았다. 앗 이 맛은? 수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큼한 수박바 녹인 맛.

왜 하필 수박이어야 했을까? 기아 타이거즈 하면 광주, 광주 하면 무등산, 무등산 하면 수박이기 때문이다. 타이거즈의 역사는 무등산의 역사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팬들은 못하는 선수나 감독이 있으면 그들 자리에 무등산 수박을 가져다 놓는 것이 승리에 더욱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곤 한다. CU 너 이 녀석 우리의 비밀병기를 어떻게 알아버린 것이지?

아니다. 다시 한 모금 마셔보니 이것은 도발이다. 수박은 여름과일이기 때문이다. CU는 기아 타이거즈 주스를 여름과일 수박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바로 기아 타이거즈는 올해 ‘가을야구’에 갈 일이 없다는 뜻이다. 건방진 녀석들. 뭔가 분해서 프로야구 순위표를 보았는데 납득이 갔다. 젠장 수박. 망할 수박.


편의점에
타이거즈 음료만 있나요?

(기아 타이거즈와 함께 나온 한화 이글스 음료, 옷만 바뀌었냐고요? 넹)

CU를 조금 들락거린 사람이라면 항변할 수 있다. “아니 옆에 한화 이글스 음료도 있는데? 왜 기아 타이거즈만 다루나요?” 음… 한화 이글스. 패션후르츠 맛이다. 시다. 신물 나. 너네 너무 잘해. 끝. 타이거즈 팬은 함부로 다른 팀에 왈가왈부를 하지 않는 법이다.

기아 타이거즈와 한화 이글스만이 아니다. CU에서는 이어서 두산 베어스, NC 다이노스, SK 와이번스, 넥센 히어로즈, 삼성 라이온즈, KT 위즈의 음료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도자료에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없다. 그렇다. 프로야구계의 도원결의 ‘엘롯기’를 우리는 음료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가을야구에서도 못 볼 수도 있다. 잠깐 눈물 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 음료를 사는 이유

핏줄 세워 비판하긴 했지만 기아 타이거즈 음료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나 또한 남아있는 5병을 모두 구매했으니까. 야구팀과 팬의 관계란 항상 그런 듯하다. 못해도 우리 팀, 잘해도 우리 팀이다. 이 흑역사 같은 시즌과 음료 또한 나중에는 그리워지리…

…라고 말하는 순간. 홈런이 터졌다. 역전만루홈런이!! 경기는 뒤집어졌다. 역전의 타이거즈! 기쁨에 기아 타이거즈 음료를 들이켠다. 그렇다. 수박이고 화채고 중요한 것은 맛이 아니었다. 승리의 맛. 아아 기아 타이거즈 음료는 승리의 맛이었다. 타이거즈 만세. 타이거즈 만만세.

(훌륭한 리뷰… 아니 훌륭한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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