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만든 배 VS 갈아만든 모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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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남자는 ‘나태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 예비군 때문이다”

세상 부지런한 사람도 이곳만 가면 나무늘보가 되어버리는 듯하다. 선선한 날씨도 폭염 같고, 이슬비도 폭우처럼 느껴지는 이 곳. 바로 예비군 훈련장이다. 국방부는 어째서 우리를 이곳에 모아서 나태지옥행을 예약시키는 것인가!…라는 잡생각을 하니 예비군 훈련이 끝이 났다.

돈 몇천원을 받고 꺄르륵 나오는 길. 미리 퇴소한 친구가 부대 앞 슈퍼에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갈아만든 배’다. 더위에는 이게 최고라며 하나 사 줄 테니 따라오라고 한다. 그렇게 둘이 슈퍼 앞에서 갈아만든 배를 마셨다. 또 이를 본 친구가 온다. 우리는 그 녀석을 빌미 삼아 또… 이런 식으로 우리는 국방부 예산을 갈아만든 배에 쏟아부었다. 하하 이렇게 천재적인 음료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지?


갈아만든 비긴즈
시작은 배가 아닌 사과였다

지난 <비락식혜, 식혜 르네상스를 열다>에서 말했듯 식혜의 인기는 ‘신토불이’ 열풍을 일으켰다. 이후 수정과, 대추음료 같은 전통음료들의 활약이 이어졌고, 기존 주스의 시장은 줄어들었다. 당시 주스시장의 40%를 차지한 주스의 명가 ‘해태음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새로운 주스가 필요하다! 신토불이 느낌으로!

(포켓몬으로 치면 이브이 같은 거다 갈아만든 사과, 딸기, 복숭아, 배)

1995년 8월, 해태음료는 ‘갈아만든… 홍사과’를 출시한다. 배가 아닌 사과가 먼저였다. 사과주스에 사과살을 넣은 이 음료는 출시하자마자 인기를 끌었다. 당시 주스의 메인스트림은 따봉… 아니 오렌지였기 때문이다. 식감 있는 사과주스는 젊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이걸로 부족하다. 해태음료는 복권을 긁듯 이것저것을 갈기 시작했다. 감귤, 복숭아, 당근, 딸기… 갈아라…아니 터져라 인기!

1996년 5월, 드디어 긁혔다! ‘갈아만든 배’가 인기를 싹쓸이한 것이다. 맛과 품질이 우수할뿐더러, 대중들이 명절 아니면 먹지 못하는 과일이 ‘배’였다. 이것을 갈아서 만든 음료가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뜨거운 여름철 더위가 판매요정이 되었다. 더위가 왔어요. 갈아만든 배를 드세요!


갈아만든 배와
갈아만든 모든 것

갈아만든 배는 출시된 해 3백 30억원이 팔렸다. 국산 배가 부족해서 더 팔지 않았다. 보리탄산, 우유탄산, 식혜에 이어서 왕관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자 롯데칠성의 ‘사각사각 배’를 시작으로 수많은 카피닌자… 아니 유사제품이 나왔다. 아니 유사라고 말하기에도 머쓱하다. 그냥 별 헤듯이 이름을 불러보자.

갈아먹는 배(한미약품), 갈아부순 배(산가리아), 갈아서만든 배(삼진인삼종합), 갈아넣은 배(신송식품), 곱게갈은 배(명진종합식품), 삭삭갈은 배(일화), 갈아서 시원한 배(유한양행), 안방 갈아넣은 배(삼호식품), 먹어봤나 갈은배(비락), 시골집 갈아서 넣은 배(삼미식품), 갈아넣은 고향배(광동제약), 골라서 갈은 배(동원산업), 썰어서 갈은 배(온누리식품)… 헉헉 이들 사이에서 갈아만든 배를 찾는 것은 ‘음료판 월리를 찾아라’가 아닌가.

(갈아만든 배는 ‘100% 국산배’라는 품질로 차별화를 시작했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누가바가 나오면 누크바가 나오고, 바밤바가 나오면 밤바라밤이 나오고, 나훈아가 나오면 너훈아가 나오는 시기. ‘갈아만든 배’는 다른 음료처럼 유사제품의 피해를 보기보다 상황을 즐겼다. 이름까지 따라할 정도로 ‘갈아만든 배’가 대세라는 것을 홍보해줬기 때문이다. 배음료 시장은 2천억원까지 커졌고, ‘갈아만든 배’는 그중에 50~60%를 차지했다.


새로운 경쟁 음료가 없다
IMF가 다 쓸어갔거든

90년대는 개성의 시대다. 어떤 음료가 전국적인 인기를 얻어도 그 집권기는 2년을 가지 못했다. 하지만 갈아만든 배의 시대를 끝낼만한 음료는 나오지 않았다.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냐고?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수많은 음료회사들을 쓸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갈아만든 배’를 만드는 해태음료도 쓸려가 부도가 나버렸다는 게 함정.

본진은 망(?)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갈아만든 배’는 IMF에도 잘 팔렸다. 경제위기에 피해를 보는 음료들은 프리미엄 주스, 전통음료, 기능성 음료였다. 오히려 프리미엄 주스를 고집하던 사람들이 눈물의 ‘갈아만든 배’를 마시는 현상이 온 것이다(그해 역대급 더위가 또 판매요정을 자처했다). 해태식품은 부도 이래 창사 최고의 매출을 올렸다. IMF를 맞기 전 1997년 5월에는 690억원이었는데, 1998년 5월에는 750억원을 팔았다(갈아만든 배, 맛동산, 브라보콘 효자 3톱).


갈아만든 배
IdH로 다시 태어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왕년에 전국을 들썩였던 음료들은 명예의 전당 같은 코너에 있다. 솔의눈, 데자와, 비락식혜, 아침햇살… 물론 ‘갈아만든 배’도 그중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호주판 GQ다. 나는 해석을 포기한다)

그러던 와중 2015년 호주판 GQ에 ‘갈아만든 배’가 실렸다. “세간에 떠도는 숙취 해소 방법들은 항상 별 효과가 없지만 한국의 이 음료는 상상을 초월한다”며 오스트레일리아 연방과학기구에 갈아만든 배의 효능을 의뢰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사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기 시작하면서 갈아만든 배는 출시된 지 20여 년 만에 다시 주목을 받는다.

심지어 외국인들이 갈아만든 배를 ‘IdH’라고 부른다며 이름의 호감도가 높아졌다(IdH는 배라는 한글을 알파벳으로 읽은 경우). 호불호가 나뉘긴 하지만 한번 맛 들인 사람들에게 IdH는 ‘파블로프의 음료’가 되어 박스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태htb가 글씨 폰트를 못 바꾼다는 소문도 있다.


갈아만든 배는
다시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까?

(주스, 숙취, 사이다 IdH 3콤보)

이제 IdH로 다시 태어난 갈아만든 배는 올 상반기 CU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과즙음료가 되었다. 그사이 갈아만든 배는 ‘숙취해소’버전이 나오기도 하고, ‘사이다’버전이 나오기도 했다. 반가운 것은 라이벌을 다시 한번 소환했다는 것이다. 롯데칠성의 ‘사각사각 배’가 ‘사각사각 꿀배’로 환생했다.

아직 제2의 전성기는 찾지 못했지만 ‘갈아만든 배’를 둘러싼 상황은 긍정적이다. 그들의 차분한 변신에는 변신이 실패하더라도 갈아만든 배를 마실 수많은 예비군이, 숙취에 쩌는 직장인이, IdH를 찾는 포리너가 있기 때문이다. 갈아만든 배는 과연 IdH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한번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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