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음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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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노동음료를 바꿀 시간이다.”

올해는 ‘마감요정’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한 마시즘. 그 명성은 수많은 지인들 사이에서’마감(이면 사라지는)요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아니야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고. 다만… 다만… 나에게 지금 필요한 음료가 없었을 뿐이야!

그렇다. 일을 할 때 마시는 음료는 특별하다. 보통 우리가 음료를 고를 때는 맛있거나, 새롭거나, 가격이 괜찮은 것을 고른다. 하지만 일 할 때 마시는 음료는 선택 기준이 다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음료이거나, 휴식을 줄 음료, 잠을 깨워줄 음료다. 우리는 이런 음료를 ‘노동음료’라고 부른다.

노동음료가 필요한 마감요정 마시즘. 그는 어떤 음료를 마셔야 할지 공부를 하는 중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무슨 음료를 마셨을까?…라고 생각하며 해야 할 마감을 미루고 있다.


이집트 스타일 노동음료
맥주로 간다

(언제나 꿈꿔왔다. 맥주를 마시며 일하는 나의 모습)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노동음료가 무엇일까? 하나를 꼽자면 ‘맥주’를 들 수 있다. 인류가 농사라는 것을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만들어진 노동음료다. 특히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가 없었으면 피라미드도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맥주가 중요했다. 인부들은 하루의 노동이 끝나면 맥주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들이켜는 맥주의 맛. 문제는 마시는 그것이 월급이었다는 것이다.

 

(비운의 투탕카멘 에일)

맥주는 중요한 화폐이자, 양식이었다. 이집트의 맥주는 카스, 하이트 같은 시원한 맥주가 아닌 빵이 되다 만 것 같은 액체였을 것이라고 한다. 1996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고고학자 ‘베리 켐프(Barry Kemp)’는 이집트 벽화와 발효통을 연구하여 정통 이집트 노동음료 ‘투탕카멘 에일(Tutankhamun Ale)’을 출시했다. 물론 시원하게 망했다. 맛이 없어서.

시간과 장소가 지나 중세 유럽에서도 맥주는 줄곧 노동음료였다. 유럽에서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알콜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중에 가장 가성비가 좋은 음료가 맥주였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맥주를 마셨고, 눈을 뜰 때부터 일과 중에도 계속 맥주를 마셨다. 음주 노동의 세계. 부럽지만 나는 알콜어린이이기 때문에 포기한다.


휴식에는 밀크티
티타임을 지켜요!

(내가 생각한 노동음료 홍차의 모습)

시간을 돌려 18세기 산업혁명 영국으로 간다. 이 때는 귀족들만 마시던 홍차가 노동자에게 까지 닿은 시기이기도 하다. 홍차를 수입해오는 무역선이 빨라졌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단가가 낮아진 덕분이었다. 물론 가격이 낮아졌다고 ‘귀족음료’에서 ‘노동음료’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시간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탓이 크다. 당시 성인 남성은 16시간, 여성은 14시간을 일했다고 한다. 오랜 노동으로 지쳐있는 자들에게 일정 시간의 휴식과 보충이 필요했다. 때문에 공장에 홍차 카트가 생기게 되었고 현장에는 홍차(우유와 설탕을 넣은 밀크티)와 간식을 배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티타임의 탄생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곳에서 마시지 않았을까?)

티타임은 계층별로 시간대와 이름이 달랐다. 노동자들의 티타임은 일반적으로 저녁을 먹는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였다. 때문에 영국의 노동계층은 점심을 ‘디너’라고 부르고 저녁을 ‘티’라고 불렀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지만,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영국 군인들은 티타임을 엄수했다고 한다. 노동인권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귀족들의 시간에 티타임을 가지지 못할 것 같아서 홍차를 노동음료로 고르기를 포기했다.


커피 브레이크
대 카페인의 시대를 열다

(건방진게 아닙니다, 단지 커피를 편하게 마시고 싶었을 뿐)

커피의 등장은 인간의 역사를 바꿨다. 사실상 세상의 야근은 이 자식… 아니 커피 때문에 시작된 것이니까. 커피와 홍차가 대중화되기 전의 사람들은 모두 술에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취하지 않을뿐더러, 정신이 맑아지는 커피의 등장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많이 바꿨다.

인간이란 자고로 술이 깨어났을 때 여러 생각이 많이 나는 법. 커피를 접하게 된 유럽인들은 더욱 많이 사고하고, 토론을 했다. 덕분에 문화과 음악 등의 예술은 물론이고 철학과 과학 등의 정신노동이 꽃을 피웠다. 커피 이전의 사회가 적당한 취기와 감동이 있는 낭만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또렷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이성의 시대가 된 것이다.

(진정한 노동커피는 한국에 있지)

커피는 휴식을 위한 기호품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미국에 인스턴트커피가 대중화되며 커피에는 ‘각성’만 남고 ‘여유’는 사라지게 되었다. ‘일을 하다 가장 피곤한 오후 4시 늘 가까이 있는 커피를 마셔요’라는 메시지로 마케팅을 하기 시작했고, 공장주들은 각성효과가 있는 커피를 노동음료로 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휴식시간이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다.

쉽고 빠르게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는 한국에 와서 또 한 번 꽃을 피운다. 바로 일체의 제조과정이 없는 완전체 커피 ‘커피믹스’의 등장이다. 탕비실… 아니 회사의 필수요소 중 하나가 된 커피믹스. 하지만 나는 카페인 내성이 생겼기 때문에 패스다.


에너지 드링크
초경쟁사회 고카페인 인간

(본격 잠대출의 시대)

드디어 마시즘의 노동음료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버지의 세대가 ‘박카스’라는 피로 해소 음료를 마셨다면, 이제는 레드불, 몬스터 에너지, 핫식스 등의 에너지 드링크 시대다. 아침에 기운이 없을 때, 야근을 해야 할 때, 심지어 회식을 할 때도 술에 섞어서 마신다. 바야흐로 에너지 드링크의 시대다.

OECD 국가에서 한국인은 하루 평균 7시간 41분을 잔다. 평균인 8시간 22분에 못 미치는 양이다. 하지만 평균 노동시간은 위에서 두 번째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야근을 많이 한다는 소리다. 커피로는 도저히 쫓지 못한 잠을 에너지 드링크를 통해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 드링크를 바라보는 시선은 묘하다. 분명 ‘힘을 내자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음료이지만 쉴 줄을 모른다. 학생일 때는 시험이니까, 취준생은 직업을 준비해야 하니까, 직장인은 일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시대가 피곤한 이유가 우리가 마시는 ‘노동음료’에 함축되어 있다.


식사대용 음료
숟가락을 들 시간도 아깝다

(점심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술 취한 사람을 깨우고, 깨어있는 사람을 야근시킨다. 에너지 드링크야 말로 노동음료의 끝판왕이 아닐까? 아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비어있는 시간이 존재한다. 노동음료는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아간다. 바로 ‘식사시간’이다. 음료는 어떤 음식을 먹을지, 또 음식을 만들고 먹는 과정에 필요한 시간을 없앨 예정이다.

식사대용음료의 가능성은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이 모여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되었다.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는 밥을 먹기가 너무 귀찮아서 간편 대용식 ‘소이렌트’를 만들었다. 미숫가루를 타 먹듯 물을 부어 마시면 하루에 필요한 영양분이 채워지는 것이다. ‘소이렌트’란 이름 자체도 영화 ‘소이렌트 그린(2022년 미래의 대체식품 이야기)’에서 따왔다.

한국에서는 ‘랩노쉬’처럼 다이어트용으로만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곧 한국에서도 식사대용 음료의 미래가 ‘노동음료’가 되지 않을까? 물론 맛이 없어서 당장에 식당으로 튀어나가고 싶지만.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의 일들은 당신을 순순히 놔주지 않을 것이니까.


마시기 위해 일하는가
일하기 위해 마시는가

시대에 따라 노동의 형태가 바뀌듯이, 노동음료가 주는 의미도 바뀐다. 초기의 노동음료들이 휴식과 연대감을 주기 위한 음료였다면, 그 뒤의 음료들은 각성을 위한 도구로 자리 잡는 듯한 기분이다. 이것 또한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이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이것을 마시기 위해 내가 일을 한 것인지, 일을 하기 위해 이 음료를 마시는 것인지 돌아볼 때다. 과연 우리의 노동음료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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