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궁전, 자판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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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음료를
‘뽑아’먹는 것을 좋아했다”

목이 마르거나, 입이 심심할 때. 혹은 내 안에 뭔가를 채우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졸라(혹은 동생의 용돈을 빼앗아) 자판기 앞으로 달려갔다. 자판기 안에는 다양한 음료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나는 음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보며 어떤 맛일지 궁금해했다.

동전을 넣고 난 뒤에 제한시간이 지나면 아무거나 랜덤으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음료를 골랐다. 그렇게 자판기 아래 배출구로 나온 음료를 마주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벌컥벌컥 갈증을 달래곤 했다.

사실 음료 자체보다도 자판기가 좋았다. 24시간 불철주야 동네 골목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 동네 방범대 마냥 불빛을 밝히며 고고히 서있는 그 늠름한 모습! 마트에서 산 미지근한 음료를 언제 시원하게 만드나 고민할 필요 없이 언제나 시원한 음료를 보관하고 있던 자판기가 든든해서 좋았다.


음료궁전 자판기

‘음료궁전’ 같았다. 지금은 대부분 자판기가 음료 회사에 따라 자기 회사 제품들만 주르륵 넣어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역시 자본주의 최고시다). 그때는 콜라부터 과일주스까지 세상 모든 음료 포트폴리오를 모아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 콜라와 이온음료를 한 번에 살 수 있다니! 심지어 원하는 대로 골라 마실 수도 있어!

자판기의 매력은 역시 음료를 뽑을 때 보여주는 스릴 넘치는 ‘밀당’에 있다. 녀석은 순순히 음료를 내어주지 않는다. 일단 제대로 된 지폐가 아니면 받지를 않는다. 구겨지거나 오래된 지폐를 넣으려 하면 “이딴 돈이면 안 받고 안 팔겠어!”라고 말하는 듯 금세 뱉어버리고, 한참 진땀을 흘리다 슥슥- 종이를 펴서 슬그머니 지폐를 밀어 넣으면… 역시나 “이따위 구겨진 돈 저리 치워!”라며 도도하게 돌아선다.

그나마 동전은 사정이 좀 낫다. 웬만큼 휘어진 동전이 아니면 연식(?)과 상관없이 동전은 잘 받아준다. 가끔 장염 걸린 사람처럼 동전을 넣자마자 반환구로 토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동전에 대해선 너그러운 편이다. 깐깐한 녀석 같으니라고!

겨우겨우 “Please take my money!”를 외치며 투입에 성공하면 성공의 빛(?)이 비춘다. 모든 자판기 샘플 음료와 버튼에 불이 들어오며 “이제 너를 허하노라”라고 말한다. 선택의 기쁨을 누릴 순간이다.


자판기를 믿지 말아요

레벨이 낮은 머글들은 여기서 방심한다. 자판기는 음료를 손에 쥘 때까지 결코 방심해선 안된다. 자판기가 꽤 자주 위장술을 쓰기 때문이다. 콜라를 눌렀는데 배출구에서 손에 잡힌 것은 사이다일 때. 사이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닥터페퍼나 아침햇살일 때. ;;;;;;;; 표시를 백만 개쯤 날리고 싶은 당황스러움이 찾아온다.

“내가 누른 건 콜라였다고!!!!!!!!”


외쳐봐야 소용없다. 자판기는 말없이 도도할 뿐.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고 마시즘은 편의점에 숨어있다는 말처럼(?) 자판기 마니아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마지막 디테일에서 갈린다. 특히 탄산을 꺼낼 때. 만랩 자판기 마니아들은 절대 자판기를 쉬이 믿지 않는다. 괴팍한 자판기들은 안에서 얼마나 흔들어댔는지 칙-하며 캔 뚜껑을 따자마자 취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쉽게 생각했다간, 자판기라고 쉬이 믿었다가 옷 버리기가 일쑤다. 절대 조심해야 한다.

음료를 꺼냈다면 로또 당첨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전 반환구에 스윽- 손을 넣어본다. 가끔씩 누군가 잊어버리고 간 동전을 얻게 된다면 나이스! 아니라도 아쉬움은 없다. (자꾸 공짜 좋아하면 탈모오니까) 시크하게 돌아선다.


강제소환 추억 오브제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자판기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가끔은 속이고, 뿜어내는 탄산으로 당황하게 만들고, 돈만 먹고 뱉질 않아서 우리를 화나게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자판기가 좋다. 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뜻한 바와 다른 결과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으며,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는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준 오랜 친구니까.

주변에 자판기보다 편의점 수가 더 많은 요즘에는 자주 이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지하철역에서 자판기를 마주하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마치 오랜만에 반가운 소꿉친구를 만난 것처럼.

Editor by 코코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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