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목욕탕과 음료수 추억의 목욕탕 음료수 BES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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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이면 온 가족이 자동차에 몸을 욱여넣어야 했다. “디즈니 만화동산 봐야 하는데…” 감긴 눈을 겨우 떼었을 때는 난 타잔처럼 몸을 빨게 벗고 있었다. 아 지긋지긋한 목욕탕. 어김없이 머리를 감으려다가 샴푸가 눈에 들어갔고, 아빠는 때밀이로 내 팔과 다리를 슥슥 밀며 지우개 때를 만들었다. 나는 복수를 해보려 아빠의 넓은 등을 박박 빌어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간지럽다~”뿐이었다.

그렇게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목욕탕을 나오면 아빠는 맞은편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줬다. 우리는 자동차 안에서 엄마와 여동생을 기다리며 각자의 음료수를 쪽쪽 빨아 마셨다. 엄마와 동생도 각자의 음료수를 마시며 목욕탕을 나왔다. 이렇게 깨끗한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그런데 왜 우리는 모두 다른 음료수를 마셨던 걸까?

01. 초딩입맛 아들의 ‘바나나맛 우유’  

고백하겠다.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빙그레의 ‘바나나맛 우유’를 가장 좋아한다. 상표명은 ‘바나나맛 우유’지만 전 국민이 ‘바나나 우유’라고 부르는 가공우유계의 1 선발. 장독대처럼 생긴 연노랑의 용기를 보기만 해도 바나나맛이 나는 것 같다.

바나나맛 우유는 빨대로 마셔야 제맛이다. 빨대를 꽂으면 바나나향과 바닐라향이 달콤하게 섞여 올라온다. 한입 쪽 빨아 마시면 달달한 바나나의 맛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차가운 새벽에 영혼을 위로받는 느낌. 이 앞에서는 바나나맛 우유에 바나나과즙이 1%밖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02. 사우나에서 잠을 자는 아빠의 ‘솔의 눈’

아빠는 바나나맛 우유를 쪽쪽 빠는 나를 애송이 취급했다. 아빠의 목욕탕 음료수는 단연 ‘솔의 눈’이었다. 솔싹 추출물로 만들어진 솔의 눈은 가슴에 털 난 삼촌들은 모두 즐기는 목욕탕의 스테디셀러였다. 나도 남자다움을 증명하려고 마셨다가 치약 맛이 나서 놀라 바나나맛 우유로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의 불호에도 솔의 눈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멘톨 맛이 주는 시원한 느낌 때문이다. 특히 사우나를 마치고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마시는 솔의 눈은 마치 산림욕의 느낌을 선사해준다. 솔의 눈의 소나무 향에서 나는 시큼한 상쾌함이 혀를 감아 돈다… 는 훼이크고 아직도 어려운 음료수다. 온탕에 들어가서 ‘아 시원하다~’를 외칠 수 있어야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그때쯤이면 나도 아빠가 되어있겠지?

03. 다이어트를 원하는 엄마의 ‘미에로 화이바’

엄마는 목욕탕을 갈 때도 장을 볼 때도 항상 ‘미에로 화이바’를 마셨다. 오돌토돌한 빗살무늬 유리병에 담긴 살구색 미에로 화이바는 엄마들이 가장 자주 마시는 음료수였다. 어린 내게는 ‘여자들만 마실 수 있는 음료수’라는 고정관념과 ‘그래도 한 번 마셔보고 싶다’라는 욕구가 항상 다투던 음료수였다.

딱 한 번 온몸에 털이 사라지고, 머리가 긴 여자가 될 각오를 하고 미에로 화이바를 마신 적이 있다. 달고 상큼한 오렌지 맛이 났다. 맛을 더 느끼고 싶었는데 100ml의 작은 유리병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에로 화이바는 마시는 식이섬유라는 타이틀을 단 만큼 소화와 다이어트에 좋다고 광고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미에로 화이바 광고 속의 모델들처럼 변하지는 못했다. 나 또한 여자로 변하진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04. 귀여운 게 마냥 좋은 동생의 ‘제티’

동생은 제티라면 사족을 못썼다. 귀엽게 생긴 아롱이와 다롱이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 같다. 때문에 목욕탕을 마친 동생은 제티를 사서 마셨다. 하하 귀여운 녀석.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우유급식 시간마다 제티를 준다는 사실을 숨기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우유를 마시면 ‘키가 큰다는’ 엄마의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는 아이들에게 ‘제티’는 마법의 가루였다. 달달하고 짭짤한 그 맛은 초등학생이 만끽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당이었다. 특히나 우유에 녹지 못하고 뭉쳐져 버린 덩어리를 침으로 녹여 먹을 때의 기분이란. 어릴 때는 역시 달콤한 것이 최고인 것 같다

당신의 마음을 적시는 목욕탕 음료수는 무엇인가요?

오랜만에 혼자 목욕탕에 갔다가 자판기를 보게 되었다. 자판기에는 내 목욕의 이유였던 추억의 음료수가 진열되어 있었다. 음료수를 꺼내어 마셨다. 추억이 담긴 음료수는 어린 시절 주말 아침으로 나를 데려간다. 맛있는 음료수도 정말 좋지만, 추억이 담긴 음료수를 이길 수는 없는 법. 돌아오는 주말에는 아빠랑 엄마랑… 동생까지 같이 목욕을 가자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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