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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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언제나 우유가 먼저였다”

그것은 우유회사를 다니는 부모님 덕분에, 젖소농장을 운영하는 친척 덕분이었다. 때문에 나는 아침을 우유로 시작했고 자기 전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마셨다. 엄마는 말했다. “우유는 완전식품이야. 우유를 마시면 키가 커지고, 뼈가 튼튼해지고, 피부가 하얘진단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집이 유난이긴 했지만(바나나맛 우유를 마시는 것이 나의 반항이었다), 다른 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아예 학교에서는 2교시가 끝나면 우유를 나눠줬으니까. 우유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안 마실 수는 없었다. 도대체 우유가 뭐길래, 언제부터 이렇게 마시게 된 것일까?


낙산의 우유
왕도 군침을 흐르게 만들다

다른 동물의 젖을 마신다는 것. 우유는 굉장히 신기한 문화다. 우유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1만 년 전 인간이 동물을 가축화하며 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 역사만 슬쩍 살펴봐도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말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하니까. 그 역사가 깊다.

하지만 우유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시대 우왕은 ‘우유소’라는 국가 상설기관을 설치해 왕실과 귀족이 마실 수 있는 우유를 생산했다. 이는 조선시대에 와서 ‘타락색’으로 이름을 바꿨다(타락은 몽골어로 말린 우유를 뜻한다). 타락색 있는 곳은 서울 동대문 근처 낙산(駱山)이다. 옛날에는 낙산우유가 최고였다.

(조영석, 젖 짜는 어미소와 송아지)

아시다시피 동물에게 우유(젖)가 나오는 것은 기간 한정이다. 심지어 살균기술도 없는 시대였기에 우유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보양식 취급(우리가 아는 우유 형태가 아닌 죽, 타락죽)을 받았다. 백성들은 엄두도 못 내고, 권력자들이 아주 가끔 임금이 하사한 타락죽을 맛볼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1565년, 명종 때는 일종의 ‘타락죽 남용죄’로 파면당한 양반이 있다. 문정왕후 남동생, 즉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이었다. 그는 궁궐에만 있는 타락죽 기계를 집에 배치해 자녀와 첩들도 마시게 했다고 한다(이를 그린 MBC 드라마 옥중화는 우유를 마시지 않고 목욕에 써버린다). 물론 다른 죄목이 더욱 많고 구구절절하겠으나 임금의 권력 위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어쩌면 부모님들이 우유를 찬양하는 것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비슷한 게 아닐까?


낙농인 21명
최초의 대량생산 우유를 만들다

아니다. 왕족이 아닌 이상 우리 조상님은 우유의 우자도 구경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죄송합니다 조상님). 우유가 사람이 마시는 식품이라고 인정받은 것은 근대 이후라고 보아야 한다. 당시 일본은 서양을 따라 하기 위해 우유를 마셨고 그 영향이 한반도에도 들어온 것이다.

1937년 7월 11일에는 최초의 대량생산 우유공장이 탄생한다. 낙농인 21명이 모여 정동에 우유공장을 지은 것이다. 이름은 ‘경성우유동업조합’ 이곳이 지금의 ‘서울우유’다.

(서울우유, 존버는 승리한다)

하지만 대량생산이라는 말만 번지르르했지 우유를 만드는 것은 고역이었다. 일단 만들어지는 것보다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1944년에는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한 우유 등록제가 실시되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는 우유를 담을 병을 구하지 못해서 미군부대의 빈 맥주병을 세척, 살균해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눈물겨운 생존(?) 덕분에 서울우유의 역사가 곧 한국 우유의 역사가 되었다. 서울우유는 출범 이후 80년 가까이 우유업계의 1등을 놓치지 않은 음료의 큰 형님이다. 사실 현재진행형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2016년에 매일유업이 왕관을 잠깐 탈환했다는 게 함정.


낙농정책이
급식우유 시대를 열다

1937년에 만들어진 서울우유(그때는 경성우유)는 1962년이 될 때까지 한국의 모든 우유를 만들었다. 이곳 말고는 우유를 만들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당시 정부는 활발한 낙농정책을 펼쳐서 국민들이 우유를 마시고 영양을 보충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이는 1962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식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서독 학생들이 우유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당시 서독 대통령인 하인리히 뤼브케에게 “우리 국민도 우유 한 번 마음껏 마셨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쉰 모양이다. 이후 서독에서는 젖소 200마리를 비롯한 우유를 생산하기 위한 여러 지원을 해준다.

그러자 다른 우유회사들이 생겨났다. 남양유업(1964년), 매일유업(1969년), 빙그레(1967년) 등이다. 이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우유계의 고인ㅁ… 아니 장수 브랜드가 되고 있다. 우유의 생산량이 늘어나자 1차로 마셔야 할 사람은 바로 성장기의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우유급식이 야심 차게 시작되었다. 물론 아이들이 대부분 유당불내증이라 우유 소화가 안 될 거라는 것은 몰랐겠지만.

(전설의 목욕탕 가공유 콤비)

그렇다. 안타깝게도 몇몇 아이들에게 우유는 화장실 직행 티켓 정도였던 것 같다. 이때 더욱 대중적으로 다가간 것이 ‘바나나맛 우유’로 대표되는 가공유다. 당시 어린이들의 로망인 ‘바나나’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음료였다. 더불어 목욕탕에서 마신 바나나맛 우유 등의 추억이 쌓이면서 여전히 사랑받는 음료가 되었다.

1986년, 급식의 힘(?)과 경제발전과 더불어 최초로 우유 소비량이 100만 톤을 기록한다. 1994년에는 200만 톤을 넘었다. IMF가 왔을 때도 부모들은 다른 지출은 줄여도 우유만은 끊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들에게 우유는 자녀의 영양이자, 건강 그리고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우유의 대중화
또 한 번의 변화가 필요할 때

‘우유는 완전식품이다’라는 말도 완전 옛말이 되었다(세상에 완전식품이 어디 있어?). 오히려 이런 띄워줌이 우유의 음모론을 낳기도 했다. ‘알고 보니 우유가 뼈 건강에 좋지 않더라’식의 논쟁이다.

대표적으로 스웨덴 칼 미켈슨 교수가 ‘매일 우유를 과량 섭취한 사람들의 고관절 골절률과 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았다’라는 결과가 뒷받침을 했다. 이점은 국내 의학채널 비온뒤 에서 당사자에게 직접 연락해본 결과 ‘과한 해석’으로 사용됨을 우려했다고 한다. 하루 1~2잔은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니 안심하자.

오히려 한국의 우유들이 걱정해야 할 부분은 다음 도약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우유에 영양을 의존하지 않는 시대. 내가 그토록 많이 마셨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 많다(애덤스미스 아저씨의 보이지 않는 손을 무시하는 가격이라거나, 급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우유에게 남은 기회는 얼마나 있을까? 더욱 맛있어지거나, 친근하게 다가올 우유의 변화를 기대해본다.

  • 참고문헌
  • 왕실에 우유를 공급한 ‘낙산(酪山)’, 명준호, 매일경제
  • 1545년 명종의 즉위와 여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신병주, 한국역사연구회
  • 황광해의 역사 속 한식, 타락죽과 수유치, 황광해, 동아일보
  • 우유에 대한 6가지 오해와 진실, 차종은, 양동주, 최초희, 비온뒤
  • 우유가 만든 세계사, 히라타 마사히로, 돌베게
  • 2018년도 우유소비조사, 한국낙농육우협회 낙농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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