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보다 정신, 크래프트 비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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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에 왔으면 버드 말고
스윗워터를 마셔야죠”

미국에 출장을 간 마시즘이 가장 많이 마신 음료가 무엇일까? 순서대로 코카-콜라, 크래프트 비어(스윗워터는 애틀랜타의 크래프트 비어다), 그다음이 와인… 아니 물이다. 당연히 미국에 왔으니 미국 맥주(버드와이저, 밀러, 쿠어스)를 마셔보려 했으나, 더 나아가 지역에서 만든 크래프트 비어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미국은 크래프트 비어의 천국이었지.

장인정신으로 무장된 유럽의 맥주와 달리, 미국의 크래프트 비어는 뭐랄까? 다양하고, 정신없고, 뽑기운도 있는 것 같지만, 활력이 넘친다. 맛있는 맥주도 많지만, 재미있는 시도를 한 맥주들도 굉장히 많다. 에디터가 재미있게 마신 체리맥주와 수박맥주는 애교에 불과할 정도다. 우주에 쏘아 올린 효모를 가지고 맥주를 만든다거나, 치킨을 맥주에 집어넣는다. 뭐야 이 두뇌풀가동 맥주는.

오늘은 어쩌면 한국 맥주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미국의 크래프트 비어에 대해 알아본다.


금주법이 끝나니
남은 것은 버드와 밀러뿐이라

(맥주를 순순히 넘기면 유혈사태는…)

미국은 원래 맥주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주민들이 집안 대대로 가지고 있는 맥주 레시피가 있었지만, 1919년 1월 16일 ‘금주법’으로 인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금주법을 폐지했을 때는 와인이고, 위스키고, 맥주고 많은 양조장과 농가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결국 미국인들에게 주어지는 맥주는 원가를 절감할 수 있고, 대량 생산에 유리한 ‘라이트 라거(Light Lager)’였다. 청량하고, 쓰지 않은 가벼운 라거다. 상표만 불러도 맛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다. 밀러나 버드와이저, 쿠어스… 하이트, 카스… 같은 맥주. 그렇다. 당시의 미국맥덕들 역시 하이트와 카스의 양자택일에서 갈등했던 한국인들과 같은 신세였던 것이다.

1978년 10월 14일, 미국 맥주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자가 양조(홈브루잉)’을 합법화시킨 것이다. ‘맥주가 맛이 없어? 그럼 니들이 만들던가!’랄까? 그러자 미국의 맥덕들은 부엌에서, 창고에서 자신들의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양산형 맥주와는 다른 맥주를 만들자!’ 이것이 크래프트 비어의 시작이다.


영국과 인도를 가로지르던
IPA는 왜 미국 맥주의 상징이 되었나

(라벨의 초록색 솔방울 같은 것이 바로 홉입니다)

미국 크래프트 비어씬에는 여러 맥주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맥주는 ‘IPA(India Pale Ale, 인디아 페일 에일)’이다. 왠지 IPA라고 하면 미국에서 온 것 같다. 뭔가 더 크래프트 비어를 좋아한다고 하고 싶으면 더블 IPA, 와일드 IPA는 마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사실 이 맥주는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행운의 편지 같은 맥주였다.

17세기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은 인도였다. 향신료와 면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덥고 습한 날씨는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맥주라도 한 모금 마실 수 있다면! 하지만 영국에 주문한 맥주가 오려면 9개월에서 12개월이 걸렸고, 많은 맥주는 유통기한을 넘겨 상해버리기가 쉬웠다.

때문에 맥주의 보존기간을 늘리기 위해 한 방법이 알콜의 도수를 높이고, 홉을 많이 넣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는 품질변화가 적었고, 밝은 색깔과 부드러운 쓴맛, 풍부한 향을 자랑했다. 때문에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맥주가 구하기 힘드니까 잘 마신 것이지. 결국 주류는 필스너, 라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미국에서는 IPA를 재발견했다. 이유는 맥주에 들어가는 ‘홉’. 미국에서 자라는 홉이 과일향과 꽃향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홉의 느낌을 살리는 맥주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물질보다 정신
크래프트 비어의 필수 조건

(맥주 종류가 빼곡한 탭룸만 보면 설렌다, ⓒMELANIO SALOME JR. PECH)

가양주 문화 정도로 그칠 줄 알았던 크래프트 비어는 미국 전체 맥주 생산량의 약 13%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1979년에는 90개가 채 되지 않던 브루어리는 지난해 7,450개를 넘었다. 또한 구스 아일랜드나 사무엘 아담스, 발라스트 포인트 같은 맥주들은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쉽게 만나는 세계적인 맥주 브랜드가 되었다. 이쯤 되니 점점 정의가 헷갈린다. 과연 ’크래프트 비어’란 무엇인가?

크래프트 비어에 대한 규정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3가지 조건이 나온다.

  1. 소규모(연간 생산량 600만 배럴 이하, 7억 리터)
  2. 독립적(거대 자본 기업이 회사 지분을 25% 이상 가질 수 없다)
  3. 전통적(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맥주가 전통적 방법의 맥주이어야 한다)

물론 이 조건을 지켰다고 해서 크래프트 비어가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크리에이티브)다. ‘양조자의 철학이 들어간 맥주’야 말로 크래프트 비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닮은 듯 아닌 듯
한국의 수제맥주 시장

미국의 크래프트 비어는 세계 각국의 맥덕과 맥주 양조장에 영감을 주고 있다. 한국은 2002년에 소규모 양조장에서 맥주를 생산 판매하게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크래프트 비어 시대가 열린 것은 2010년부터다. 특히 ‘한국맥주는 대동강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대동강 드립(?)과 함께 ‘수제맥주’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열리게 되었다.

과연 맥주를 좋아하는 민족. 짧은 역사 동안 수제맥주는 빠르게 성장했다. 처음에는 ‘공장형 맥주’를 벗어난 맥주 정도를 부르는 걸로 만족했다. 하지만 곧 지역 이름을 따서 수제맥주를 만드는 맥주의 부동산 시대가 열렸고, 현재는 실력도 재료도 많은 부분이 섬세해졌다. 마시즘에서 인터뷰했던 기네스의 ‘비어 스페셜리스트’도 한국 맥주 할 때 손꼽은 것인 역동적인 크래프트 비어라고 할 정도다.

하지만 아직 시작일 뿐이다. 우리나라 전체 맥주 소비 중에서 수제맥주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해 1.4%에 불과했다. 또한 맥주를 만드는 일 자체가 농사 기반이라 홉농사, 보리농사들도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기대된다. 수제맛도 정신도 가득찬 한국의 크래프트 비어를. 우리도 동네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이곳에 왔으면 이 맥주를 마셔야죠?’라고 추천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 타이틀 이미지 출처 : TheDigitel Beau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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