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에 가장 어울리는 만년솔로의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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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발라드의 계절은 돌아오고 말았다. 음악 차트를 스윽 내려보면 ‘오늘 헤어졌다’느니 ‘허전하다’느니 ‘술이 문제야’라느니 ‘다시 시작하자’라는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 같은 노래 제목들이 난무한다. 비단 음악 차트의 문제만은 아니다. 거리에서도, 노래방에서도 발라드가 울리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헤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그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국민적인 ‘사랑의 작대기’ 같은 거라도 했던 거야?

눈이 녹으면 벚꽃이 피는 것처럼, 햇빛이 쨍해지면 매미가 우는 것처럼, 자고로 사람이라면 날씨가 쌀쌀해지면 발라드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주위를 둘러보라. 모두들 절절한 발라드 가사를 자기 사연인 것처럼 온몸으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내 이어폰에서는 뉴욕 빈민가에서 만들어진 거친 힙합이 따발총마냥 쏟아지지만, 겉으로는 눈치껏 슬픈 척 표정을 지어야 한다. 최대한 슬픈 생각을 하면서 걷자. 너는 방금 헤어진 거다. 그래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너는 지금 심장이 없어. 아니, 잠깐 그러면 죽잖아.

아무래도 나는 발라드가 지배해 버린 이 세상에서 발라드를 즐기지 못하는 불량품인 듯하다. 평소에 발라드를 듣지 않으니 잘 부르지 못하고, 발라드를 못 부르니 노래방에서는 탬버린 밖에 못 치고, 탬버린밖에 못 치니 인기가 있을 리가 없고, 인기가 없으니 발라드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악순환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은 발라더들의 눈 밖으로 숨어 ‘이번 생에는 만남도 이별도 틀렸다’며 좌절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학교 신입생 때 만났던 한 선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레쓰비형’이다. 본명이 따로 있지만, 그를 떠올리면 이름 석 자 보다 레쓰비 캔커피가 떠올랐다. 레쓰비형은 대학의 문턱을 ‘EBS’가 아닌 청춘시트콤 ‘논스톱’덕분에 넘어온 진정한 사랑꾼이었다. 문제는 꿈에 그리던 대학에 왔지만 연애… 비슷한 것도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애 의욕이 너무 앞섰다고 할까? 그는 조별 모임에서 ‘디카(디지털 카메라)’를 가져오라고 말했는데 혼자 설레서 ‘기타’를 가져와 우리를 벙찌게 만들었다.

그런 그도 2학년이 되자 ‘이번 생은 틀렸다’며 좌절을 했다. <논스톱>은 사실 청춘시트콤이 아니라 공상 과학 드라마였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된 것이다. 그때쯤 문제의 광고를 보았다고 했다. 바로 ‘레쓰비’ 광고. 레쓰비를 든 여자 후배가 “선배 나 열나는 것 같아”라는 그 광고 말이다.

그는 그 광고를 통해 연애란 후배가 생겼을 때 시작되는 것임을 깨닫고 군 입대를 미뤘다. 그러자 정말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문제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남자 후배들(그중 하나가 나였다)만 줄줄 생겼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레쓰비형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기말고사 시즌 독서실에서다. ‘드디어 공부란 것을 하시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쯤 그는 레쓰비 위에 포스트잇을 부적처럼 붙이고 돌아다녔다. 눈치 빠른 친구들은 단번에 알았다. 레쓰비형은 아직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구나. 후배에게 레쓰비를 받을 수 없으니, 이제 레쓰비를 직접 뿌리고 다니는구나.

레쓰비형은 공부를 하(는 척하)다가 떨어지는 낙엽이라도 보면 포스트잇에 ‘날씨가 좋죠’, ‘공부가 힘들죠’같은 멘트를 담아 여기저기에 놓고 왔다. 때로는 걱정이 되어서 “저 사람은 레쓰비를 확인하고도 안 마시고 있는데요?”라고 물어봤으나. “빨리 마시면 금방 마음이 식으니까 아껴 두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났다. 결국 레쓰비형은 머리를 박박 밀고 군대로 떠났다. 그 모습이 짠해서 한 때는 레쓰비 광고를 원망했다. 하지만 음료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공유는 카누를 들고도, 원빈은 티오피를 들고도 한없이 멋지기만 하잖아. 애초에 될 녀석들은 자판기 커피만 뽑아 들어도 시애틀 스타벅스 1호점 분위기가 난다니까.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은 “대체 연애를 못한 사람 이야기를 왜 하냐”라고 따진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레쓰비형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는 못했지만, 열렬히 사랑도 해보고, 가장 슬픈 이별을 겪기도 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떨어지는 낙엽보다도 발라드에 어울리는 만년솔로였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사랑 하나 받기 힘든 나날이지만, 편의점에는 우리 손을 데워줄 따뜻한 레쓰비가 준비되어 있다. 오랜만에 레쓰비를 마시며 생각을 했다. 요즘은 독서실에 음료를 가져가는 것은 안 되는데. 레쓰비형은 잘 지내고 계실까?

  • 해당 원고는 문화 매거진 <언유주얼 An usual 5호 – 어차피 애창곡은 발라드>에 기고한 원고입니다(마시즘과 언유주얼 양측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언유주얼에서는 마시즘의 음료 에세이를 만나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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