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음료로 마시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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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정해진 주제로 잡지(언유주얼)에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는 소소한 일탈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당황스러웠다. 음료 덕후인 나에게 ‘음료’가 아닌 ‘덕후’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너 자신을 알라’와 비슷한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주제가 아니던가. 분명 덕질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덕질은 즐거워야 하는 것인데 이 세계는 전쟁과 같기 때문이다.

음료미디어 ‘마시즘’은 덕력이 없는 풋내기들은 견디기 힘든 곳이다. 나만 해도 지난 2년 동안 약 700여 개의 음료를 마시면서 숱한 위기를 겪었다. 숙취 해소 음료의 효과를 비교한답시고 한 달간 매일 술을 마신 적도 있고, 포도봉봉 알맹이를 한 알도 놓칠 수 없다며 하루 종일 포도봉봉만 마신 적도 있다. 워크샵에서는 삼다수와 아이시스 생수를 눈 감고 맞춘다고 했다가 두 컵 다 아이시스여서 손목이 위험할 뻔도 했었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마시즘의 2년)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라면’으로 음료를 만들어 비교한 일이다. 음료 덕후들에게 그들만의 성이 있다면, 라면 덕후들 역시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라면 티백’이라는 신제품 출시와 함께 이 둘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라면의 음료 침공, 이대로라면 그 많은 라면 덕후들이 음료 리뷰 시장을 장악할지 몰라!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음료계의 수호자(?) 마시즘이 나섰다. 라면 티백을 비롯한 너희 라면 국물들의 맛을 비교해 주겠다. 덤벼라!

음료 덕후들과 라면 덕후들의 공동경비구역 편의점에 들어갔다. 매일 같이 음료만 사던 내가 봉지 라면들을 하나씩 장바구니에 넣기 시작했다. 신라면부터 시작해서 진라면 매운맛, 진라면 순한맛, 너구리, 삼양라면, 무파마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른 종류의 라면들도 샀다. 불닭볶음면, 비빔면, 짜파게티, 사리곰탕… 편의점 사장님은 피난을 떠나는 사람을 보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대로 돌아와 분말스프로만 국물을 만들었다면 진정한 음료 덕후가 아니다. 나는 라면 티백과 똑같이 라면 국물을 티백으로 우려내리라 마음먹었다. 적당량의 분말 스프와 건더기 스프를 다시백 안에 넣고 실로 묶은 다음 라면 포장 모양 라벨을 달았다. 라면 종류마다 스프의 구성과 색깔이 달라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향도 비교해 보려고 코를 댔다가 스프 가루가 코에 들어가서 큰일 날 뻔도 했다. 빨간 스프여서 다행이었지 사골곰탕 스프였다면 정의의 은팔찌를 선물 받을 뻔했지 뭐야.

(고생해서 만든 앙증맞은 라면티백)

맛을 볼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음료 덕후의 입장에서 이를 맵다, 짜다, 맛있다 등의 단순 리뷰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음료 리뷰는 사이언스란 말이야(물론 나는 문과다). 나는 색깔과 투명도부터 코로 맡을 때 나는 첫 향, 혀에 먼저 닿는 맛, 목으로 넘어가며 중간을 스치는 맛, 모두 들이키고 나서 남은 끝맛, 넘어가는 바디감부터 마지막 향까지. 마치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듯 세세하게 음미했다. 그래서 맛이 어땠냐면…… 맵고, 짜고, 맛있다. 헤헷.

콘텐츠를 예고하자 독자들의 댓글 문의가 달렸다. ‘라면 티백으로 라면을 끓일 수 있냐’고? 음료계의 기미상궁이 이 질문을 놓칠 수 없었다. 실험해 보니 라면 티백 한 개로는 라면을 끓이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티백 세 개와 컵라면을 이용하면 제법 라면 다운 라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면티백 3개를 살 돈이면 그냥 라면을 사는 게 경제적이다.

그다음으로 실험해볼 질문은 ‘라면 티백으로 아이스티’를 만들어 달란 요구였다. 간단했다. 끓는 물 약간에 라면 티백 두 개를 진하게 우리고 찬물과 얼음을 넣어 아이스티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신다. 그리고 죽는다(?).

차갑게 식은 라면 국물을 마시는 것만큼 세상에서 슬프고 자괴감이 드는 일을 없을 것 같다. 만약 독자들이 ‘밥까지 말아먹으라’라고 했다면 반드시 그를 찾아내 법정에 세우고 말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장장 여덟 시간이 걸렸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퇴근시간이 다가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덕질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때론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가만히 앉아 숨 쉬는 일만 못해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만의 재미를 찾는데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덕질이란 것이 더욱 빛나는 게 아닐까?

덕후는 덕후를 알아보는 법. 콘텐츠가 올라오자 사람들은 역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올린 지 한 시간이 되지 않아 라면 티백을 만든 회사에서 연락이 올 정도였다. 그들은 흥분하며 말했다. “너무 재미있게 봐서 그런데 저희 라면을 몇 박스 보내드려도 괜찮을까요?”

아… 아니요. 제발 그만해. 잘못했어요.

  • 해당 원고는 문화 매거진 <언유주얼 An usual 6호 – 도덕책>에 기고한 원고입니다(마시즘과 언유주얼 양측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언유주얼에서는 마시즘의 인생음료 에세이는 물론 다양한 덕후, 작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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